인류의 지식축적과 그로 말미암은 기술발전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 적이 없다. 신기술의 유일한 책무는 인류의 인구 수용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인류가 위기에 직면하면, 인구 성장은 지체되었고, 지식으로 이를 돌파하면 새로운 국면이 접어들 때까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는 무한에 가까운 개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번잡스럽고 혼미한 관경이다.[1] 인간의 대량생산과 대량사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대혼란의 중심에서 개인의 목가는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불연속적인 개체는 짧은 생애 기간 동안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조금이나마 축적한 무엇이라도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한다. 죽음은 절대적 손실을 의미한다.[2]
혼미의 급류에서 고고하게 무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연속적인 개체 뿐이다. 하지만 현대 유물론은 모든 종류의 연속성을 물질세계 내로 끌어들여 해체시켰다. 바타유George Bataille이 죽음과 함께 개체가 연속성을 획득한다고 한 말은 달콤한 거짓이다. 따라서 연속성의 권위는 개체의 관점에서 착각을 유발하는 수천 년 단위의 미시적 불연속 개체에게 전이되었다. 이런 개체는 실제 유기체라기보다는 봉건 사회와 같은 범유기체적 시스템이다. 맑스Karl Marx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서 "sorcerer who is no longer able to control the powers of the neither world whom he has called up by his spells"라고 한 맥락은 이와 일치한다.[3]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위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행동은 덜 불연속적인 개체에 기여하는 것 뿐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신자유주의가 시민사회의 자유를 달성시켰다고 보았는데, 신자유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박탈을 규율하는 생산의 원천을 다원화했을 뿐이다. 생산된 자원 중 일부는 가치생산에 소비되는데, 이는 개체에게 귀속된 후 사망과 함께 소멸하므로 모두 무의미한 낭비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개인들을 가치생산의 공장 안에서 채찍질하면서 완전히 무가치한 삶으로 전락시킨다. 개인은 일생동안 가치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무가치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지식축적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의 노동은 무의미하므로, 인간 개체에게 남은 유일한 의미는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지식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희생된 개인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진 아테네의 인신공희에 비유할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칠 테세우스적 영웅은 지식축적의 종료이자 정지사회의 도래이다. 정지사회의 존재는 인류에게 메시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사회가 억겁의 축적 끝에 반드시 정지상태로 귀의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자유주의가 촉발하는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묵시록적 계시이자 새로운 도그마가 되었다.
정지사회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부여하여 인류가 상실한 삶의 의미를 반환시키고 불연속성이라는 개체의 한계로 인해 빼앗긴 인간의 권력을 반환하는 유토피아이자 그 자체로 사후세계인 천국이기도 하다. 아무도 태어나거나 사망하지 않으므로 혼미하지 않다. 안정과 행복으로 충만한 절대자의 삶을 영위한다. 정지사회의 도래 전 개인들이 기술발전을 위해 투신하는 것, 정지사회로 가는 길목의 모든 희생이 무시가능한 문제로 전락하는 것 또한 이를 위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는 스캠이다. 기술발전의 완성은 원시적으로 불능이다. 이는 또다시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불연속성에 의해서 촉발된다. 모든 관찰은 주체 외부의 사건과 그로 인해 유발된 내적 체험으로 구성된다. 과학 연구가 타인으로부터 수행되었을 때, 그 연구와 그 연구를 받아들이는 주체 사이에는 불연속적 존재 사이의 무한한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요컨대 직접 건네받은 물리적 자료라도 저승의 사자가 은연 중 별자리로 보내는 비밀스러운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모든 연구는 해독하여 작자의 내적 체험을 제거하는 정제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번데기가 껍질을 깨고 나올 떄 그것은 바깥 세계로의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파멸을 의식하는 순간이듯이 인간의 내적 체험도 그렇게 얻어진다."[4] 따라서 모든 과학 연구는 개인에 의해서 다시 수행된 후 집대성되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인간은 인간이 놓여있는 물리세계와 그 동물적 특성 때문에 모든 정보를 저해상도의 2차원 정보로 수집한다. 2차원이 넘는 고차원의 정보들이나 고해상도의 정보들은 모두 2차원 정보의 병렬화를 통해 시간축을 더하여 최대 3차원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축 정보는 끊임없이 망각에 의해 결실된다. 시간축 정보의 결함으로, 각 개체가 온전하게 파악 가능한 것은 초점 상의 매우 적은 2차원 정보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론은 대단히 한계적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추상화된 모델에 불과하여 보잘것없다. 어떤 경험에 대한 수십 여편의 글귀나 연구도 기실 그 체험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로 인해 시간은 인간 개체에게 결코 반환될 수 없다. 미래 인류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을 좇는다는 점에서 불행하고 무의미하다. 불행과 무의미로 구성된 영겁의 시간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1] George Bataille. (2009). 에로티즘 (조한경 역). 민음사. (원서출판 1957).
[2] 한병철. (2015).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3] Karl Marx, Friedrich Engels. (1888). The Communist Manifesto (S. Moore, Trans.). (Original Work published in 1848)
[4] George Bataille,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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