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표(校標)는 드물게 교장(校章)이라고도 하는데, 학교를 상징하는 휘장을 의미한다. 학교를 나타내는 여러 상징 중에서도 물리적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 덕분에 학내 구성원들을 모으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곤 한다. 구성원의 수가 많고 종종 여러 캠퍼스로 구성되는 대학에서는 교표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 오늘날 대학이 학자들의 활동 근거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는 국내 학자들의 얼굴로서의 교표를 떠올릴 수도 있다.
따라서 교표는 단순히 창의적이거나 이것저것 잡다한 의미를 넣는 디자인적 요소로서 기능해야 한다기보다는, 겨레의 과거를 둘러보고 세계의 앞날을 밝히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대학의 사명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 대학의 교표들은 실제로 그런 관점에서 제작되었는데, 이를 살펴보기 위해 서양 주요 대학들의 교표를 보면 주로 방패 모양의 휘장에 라틴어 경구가 쓰여진 것이 눈에 띈다.
서양 대학들의 교표는 문장(crest)으로, 'coat of arms'의 형태를 갖고 있다. 'coat of arms'는 문장(紋章)으로 번역되곤 하나 실제로는 중세 기사들의 외투(surcoat)에 피아식별을 위해 그려넣곤 했던 군사적 용도의 상징이다. coat of arms는 십자군 전쟁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로는 유럽 문화권에서의 가문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흔히 사용되고는 했던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교표를 보면, 그러한 방패 안에 라틴어로 쓰여진 책들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의 라틴어 역시도 희랍어와 함께 서양 학문의 뿌리를 구성하는 언어로, 아이작 뉴튼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한 가장 위대한 저작들은 라틴어로 쓰였기에 이 역시 자연스럽다.
이러한 형태는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차용하고 있는 형태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coat of arms의 형태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의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의 교표를 보면 모두 동일하게 방패 모양의 문장을 바탕으로 사용하고 있고, 흔히 사용되는 라틴어 경구를 갖다 넣어놓거나, 만년필⋅깃털⋅횃불⋅서양식 책 등 우리 민족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징물들을 배치하여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저와 같은 방패의 형태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Fig. 3 참조). 이와 같은 형태는 해방 이후 설립된 우리나라 대학들이 조상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단절을 선언한 후 서양의 대학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눈을 돌려 동양의 대학들을 살펴보면 우리 대학들의 교표에서 또 다른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한자 문화권의 대학들 교표를 살펴보면, 자국 혹은 자교 문화나 문자를 토대로 한 교표를 내세우고 있다. 한 예로 베이징대학(北京大学)의 경우 원형의 로고 안에 루쉰(鲁迅)이 그린 북대(北大) 문자를 그 로고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1]. 북대와 마주보고 있는 칭화대학(清华大学)의 경우에도 원형의 로고 안에 자국어로 쓰인 모토인 "自强不息、厚德载物"를 그려넣고 있다. 일본의 도쿄대학(東京大学)이나 교토대학(京都大学)을 살펴보아도 자교의 주요 상징물들을 바탕으로 교표를 구성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2,3].
그런 생각으로 우리 대학들의 교표를 다시 살펴보면, 학교 이름을 떼놓고 보았을 때 우리 민족의 대학이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많지 않음은 자명하다. 그나마 개중 나은 것이 고대의 교장인데, 방패의 모양은 아쉽지만 그 안에 붉은 색으로 그려진 호랑이는 우리의 것이라고 인정할 만 하다. 그런데 이마저도 사실 2005년에 개정되어 교장에 있는 국문을 빼어 버리고 영어로 대체하였는데, 민족의 대학을 자처하는 대학이 하는 행보로서는 영 아쉽기만 한 것이다.
참조
[1] https://english.pku.edu.cn/news_events/news/campus/3667.html
[2] https://www.u-tokyo.ac.jp/en/whyutokyo/hongo_hi_0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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