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는 전근대사회까지 타동사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욕망이다. 각 개인은 다른 개인에 의해 욕망의 대상이 될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 양상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며 해체되었다.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관계를 금전적으로 환원시켰다. 이에 더해, 사회관계망의 발달과 인구 수 증가는 각자의 상대방을 유일무이한 선택지가 아니라 무한대의 선택지 중 가장 경제적인 선택으로 전락시켰다. 상대로부터의 피선택(被選擇)도 모순적이게도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애시장 풀 내에서 본인을 상품화하여 전시하는 능동적인 판매로 달성된다. 상품의 광고를 위해 후기근대사회까지도 완고한 비밀로 남아있던 프라이버시의 영역까지 인터넷 상에 공공연하게 전시된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상황에서는 사랑할 상대방에 대한 상상과 환상이 끼어들 틈이 없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한 번 세상 밖 이데아의 완전한 정보를 대면한 개인은 다시 무지(無知)의 동굴 안으로 돌아와도 그림자를 보고 상상할 수 없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환멸 뿐이다. <햄릿>의 오필리아가 죽음에 이르는 에로스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햄릿에 대한 정보의 현저한 부족 때문이었다.
바타유George Bataille는 에로스적 행위의 기본이 "대상이 평소 유지하던 폐쇄적 존재구조를 파괴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폐쇄적 존재구조는 바타유가 말했던 나신(裸身) 이상의 사생활의 비밀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자본축적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모조리 처분해버린 오늘날 개인들에게는 잔존하는 폐쇄성이 없다. 비밀은 한 번 공개되면 무기력하다. 이런 무기력한 개인들의 집합인 현대의 연애는 따라서 만인과의 사랑이거나 무성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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